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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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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빌은 자파와 아스칼론 백작 아모리 1세와 쿠르트네의 아그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예루살렘 왕국의 공주였다. 그녀는 보두앵 3세의 조카이자 멜리센드 여왕의 손녀였다. 1174년 부왕 아마우리크 1세가 사망한 후, 나병을 앓고 있던 남동생 보두앵 4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고, 1176년 몽페라토의 기욤 롱소드와 결혼했다. 기욤이 이듬해 사망한 후, 시빌은 기 드 뤼지냥과 재혼하여 야파와 아스칼론을 소유했고, 남편을 지지하는 파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186년 보두앵 5세가 사망하자 시빌은 여왕으로 즉위하여 남편 기를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함락된 후 트리폴리로 피신했으며, 아크 공방전에서 119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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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예루살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3세기 미니어처 상세 그림, 예루살렘의 여왕 시빌
13세기 미니어처 그림의 상세 모습
칭호예루살렘 여왕
통치 기간1186년 – 1190년
대관식1186년
선임자보두앵 5세
후임자이사벨 1세, 콘라트 1세
계승 유형후계자
섭정
섭정 유형공동 통치자
배우자윌리엄 롱소드
왕가앙주 가문
자녀보두앵 5세
뤼지냥의 앨리스
뤼지냥의 마리아
출생기원전 1159년경
사망1190년 7월 25일
사망 장소아크레
가계
아버지아모리 1세
어머니아그네스 드 쿠르트네

2. 어린 시절

시빌은 자파와 아스칼론 백작 아모리 1세 (예루살렘)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쿠르트네의 아그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 중 장녀였다. 그녀의 출생 연도는 부모가 결혼한 1157년과 남동생 보두앵 4세 (예루살렘 왕)가 태어난 1161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버지 쪽으로는 멜리센드 여왕과 풀크 왕의 손녀였으며, 당시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던 보두앵 3세 (예루살렘 왕)의 조카였다.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 계급인 프랑크족은 서유럽에서 레반트로 이주해 온 가톨릭교 신자들이었고, 고대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서구 문화를 유지했다. 시빌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아모리 1세의 이복 여동생인 앙주의 시빌에게서 따온 것이다.

1163년 보두앵 3세가 사망하자, 예루살렘 고등 법원은 아모리 1세에게 왕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아그네스와의 혼인 무효를 요구했다. 아모리 1세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청원하여 시빌과 보두앵이 적법한 자녀임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부모의 혼인 무효 이후, 당시 서유럽 귀족 사회의 관습에 따라 시빌은 예루살렘 근처의 성 라자루스 수도원에서 대고모이자 수녀원장인 요베타에게 맡겨져 교육받았다. 이로 인해 어머니 아그네스나 왕위 계승자인 남동생 보두앵과는 거의 교류하지 못했다.

아버지 아모리 1세는 이후 비잔티움 제국 황족인 마리아 콤네네와 재혼하여 두 딸을 더 낳았는데, 그중 이사벨라만이 유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아모리 1세는 자신의 아버지 풀크나 형 보두앵 3세처럼 자신도 일찍 사망하여 어린 자녀들이 왕위를 계승할 경우를 우려했다. 특히 아들 보두앵이 미성년일 경우 섭정을 맡아줄 가까운 남자 친척이 없었기에, 1169년 티레 대주교 프레데릭 드 라 로슈에게 시빌의 남편감을 서유럽에서 찾아오도록 지시했다. 신랑감은 높은 신분과 정치 경험을 갖춘 인물이어야 했다. 아모리 1세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매형이자 영국 왕가와도 인척 관계인 상세르의 스테판 1세 백작을 선택했다. 스테판은 1171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당시 시빌의 남동생 보두앵 4세 (예루살렘 왕)가 불치병인 나병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아모리 1세는 시빌과 스테판을 미래의 공동 통치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테판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시빌과의 결혼을 거절했다.

3. 왕위 계승

1174년 7월 아마우리크 왕이 이질로 사망하자, 예루살렘 고등 법원은 그의 후계자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시빌의 13세 된 남동생 보두앵이 명백한 후계자였지만, 초기 나병 증상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당시 15세였던 시빌이 유일한 다른 대안이었다. 여성 상속은 법적 근거가 있었고, 아마우리크의 어머니이자 시빌의 할머니인 멜리장드가 아들들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던 선례도 있었다. 그러나 멜리장드와 달리 시빌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으며 미혼이었다. 라틴 동방에는 그녀와 결혼할 만한 적합한 독신 남성이 없었다. 트리폴리의 레몽 3세 백작과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는 너무 가까운 친척이었고, 왕국의 남작 중 한 명과의 결혼은 다른 귀족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외국에서 남편감을 찾아야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문제였다.

결국 보두앵 4세가 왕으로 선택되었고, 그가 미성년인 동안 병이 악화될 경우를 대비해 시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남편을 찾아주기로 결정되었다. 보두앵 4세의 건강은 즉위 후 급격히 악화되어 나병 진단이 확실해졌고, 시빌의 결혼 주선은 더욱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레몽 백작과 고등 법원은 몬페라토 후작 몬페라토의 기욤 5세의 아들이자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사촌인 몽페라토의 기욤 롱소드를 시빌의 남편으로 선택했다.

기욤은 1176년 10월 동방에 도착했고, 시빌은 그해 11월 기욤과 결혼하여 야파와 아스칼론 백작령을 받았다.

4. 첫 번째 결혼

동생 보두앵 4세가 나병을 앓고 있어 후계자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왕국의 후계자인 시빌의 결혼이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와 예루살렘 왕국의 최고 법원(Haute Cour)은 신랑감을 물색했다.

선택된 인물은 몬페라토 후작 몬페라토의 기욤 5세의 아들이자,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사촌인 몽페라토의 기욤 롱소드였다. 기욤은 1176년 10월 동방에 도착했고, 같은 해 11월 시빌과 결혼했다. 결혼과 함께 기욤은 야파와 아스칼론 백작령의 백작위를 받았다. 이로써 시빌은 왕국 내에서 독자적인 영지를 소유한 유일한 여백작이 되어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짧았다. 1177년 4월경, 시빌이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욤은 심각한 병에 걸렸고, 결국 그해 6월에 사망했다. 시빌은 자신의 권리(수오 유레)에 따라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 부인이 되었다. 1177년에서 117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시빌은 아들을 낳았고 오빠의 이름을 따 보두앵이라고 이름 지었다.

기욤이 사망한 직후, 시빌과 보두앵 4세의 사촌인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필리프는 자신의 봉신과 시빌을 결혼시키려 했으나, 최고 법원은 시빌이 임신 중인 과부로서 1년의 애도 기간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시빌의 다음 남편 선택권을 둘러싼 필리프와 최고 법원 간의 갈등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시빌의 애도 기간은 1178년 6월에 끝났고, 7월 1일부터는 공적인 활동에 오빠 보두앵 4세와 함께 참여하며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5. 재혼과 왕국 내 분열

13세기 아크레에서 시빌라와 기의 약혼과 결혼을 묘사함


1180년 성주간 동안,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는 프랑스필리프 2세 즉위 후 고조된 갈등으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으로 올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연대기 작가인 에르눌과 티레의 윌리엄은 시빌라의 재혼 과정을 다르게 기록했다. 에르눌에 따르면, 시빌라는 살라딘의 포로가 된 보두앵 디블랭에게 편지를 보내 몸값을 치르고 돌아오면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어머니 아녜스 드 쿠르트네의 설득으로 푸아티에 출신 기사 기 드 뤼지냥과 결혼했다. 그러나 역사가 버나드 해밀턴은 에르눌의 기록이 이벨린 가문에 편향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티레의 윌리엄은 1180년 성주간에 트리폴리의 레몽 3세 백작과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 공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보두앵 4세 국왕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기록했다. 해밀턴은 이들의 의도가 시빌라를 보두앵 디블랭과 결혼시킨 후 국왕을 퇴위시키려는 것이었으며, 국왕이 시빌라를 기 드 뤼지냥과 결혼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무산시켰다고 주장한다. 보두앵 디블랭이 국왕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로는 이벨린 가문이 신흥 귀족이었다는 점과, 살라딘이 레몽과 보에몽의 음모를 알고 보두앵의 몸값을 국왕 수준으로 책정하여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된 점 등이 거론된다.

1180년부터 시빌라는 기와 함께 야파와 아스칼론의 영주가 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앨리스와 마리아를 포함한 네 명의 딸이 태어났다. 이 결혼은 왕국의 귀족들을 두 파벌로 나누었다. 기를 지지하는 파벌에는 시빌라 자신과 국왕 보두앵 4세, 어머니 아녜스, 의붓아버지 시돈의 레날드, 외삼촌 쿠르트네의 조슬랭 3세, 그리고 샤티용의 레날드 등이 속했다. 반대 파벌에는 시빌라의 부계 친척인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이벨린의 보두앵과 발리앙, 그리고 계모 마리아 콤네네 등이 있었다. 반대 세력이 다른 왕위 계승 후보를 내세우는 것을 막기 위해, 국왕은 어머니 아녜스의 조언에 따라 1180년 10월 이복 여동생 이자벨라를 토론의 험프리 4세(샤티용의 레날드의 의붓아들)와 약혼시켰다. 1181년 3월부터 시빌라와 기는 공식 석상에서 보두앵 4세 국왕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6. 보두앵 4세의 통치와 섭정 문제

보두앵 4세의 나병은 빠르게 악화되어 1183년에는 시력을 잃고, 부축 없이는 걷거나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열병에 걸린 국왕은 그해 6월 최고 법정을 소집하여 기 드 뤼지냥섭정으로 임명했다. 이때 보두앵 4세는 국왕의 칭호와 예루살렘만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는 인기가 없어 효과적인 군사 지도자가 되지 못했고, 무력해진 국왕에게 예루살렘을 티레와 교환하자는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심각한 모욕을 주었다.

1183년 말, 살라딘은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와 토론의 험프리 결혼식이 열리는 동안 케라크 성을 공격했다. 보두앵 4세는 직접 군대를 소집했는데, 이는 기가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기에게서 섭정직과 사실상의 계승권을 박탈했다. 이후 귀족들은 기, 아녜스,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트리폴리의 레몽, 시돈의 레이날, 이벨린 형제 등을 포함하여 계승 문제를 논의했으나, 시빌라의 지지자인 샤티용의 레이날과 코트네의 조슬랭은 제외되었다. 결국, 시빌라 다음으로 강력한 계승권을 가진 그녀의 다섯 살 된 아들 보두앵 5세를 공동 국왕으로 즉위시키자는 아녜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대관식은 11월 20일에 거행되었고, 어린 보두앵 5세는 의붓아버지인 기를 제외한 모든 남작으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았다. 보두앵 4세와 그의 군대는 케라크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풀었다.

13세기 아크레에서 묘사된 보두앵 4세의 죽음, 보두앵 5세의 대관식, 그리고 레몽의 섭정 임명


보두앵 4세가 사망할 경우 시빌라와 기가 섭정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병약한 국왕은 이를 막기 위해 그들의 결혼을 무효화하려 했다. 그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와 논의했다. 그러나 기는 헤라클리우스와의 친분을 통해 보두앵 4세의 의도를 미리 알았을 수 있으며, 시빌라 역시 기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였다. 케라크 포위가 풀린 후, 기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곧장 아스칼론으로 가 시빌라에게 연락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기와 합류했다. 결혼 무효화는 부부의 참석 없이는 진행될 수 없었고, 그들은 국왕의 소환에도 불구하고 아스칼론을 떠나기를 거부하며 이 계획을 좌절시켰다. 보두앵 4세는 다음으로 야파와 아스칼론 영지를 몰수하려 했으나, 야파만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1185년 초 임종을 앞둔 보두앵 4세는 병약한 어린 조카 보두앵 5세를 대신해 왕국을 통치할 섭정으로 트리폴리의 레몽 3세를 지명했다. 레몽은 보두앵 5세가 일찍 사망할 경우, 교황신성 로마 황제와 잉글랜드 및 프랑스 국왕의 조언을 받아 왕위를 시빌라와 이사벨라 중 누구에게 넘길지 결정해야 한다는 조건하에 섭정직을 수락했다. 최고 법정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보두앵 4세 앞에서 레몽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어린 왕의 후견인은 그의 외삼촌인 코트네의 조슬랭에게 맡겨졌다. 레몽 측근들은 시빌라의 즉위를 막기 위해 그녀의 부모(아모리 1세와 아녜스 드 쿠르트네)의 혼인 무효를 근거로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복동생 이사벨라가 부왕 아모리 1세의 통치 중에 태어났다는 점(자주색에서 태어남)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이사벨라의 비잔틴 출신 어머니 마리아 콤네나에게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보두앵 4세는 1185년 3월 또는 늦어도 1185년 5월 16일 이전에 사망했으며, 이후 시빌라의 아들 보두앵 5세가 단독 국왕으로 기록되었다. 보두앵 5세의 친할아버지인 몬페라토의 굴리엘모 5세 후작은 어린 국왕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7. 여왕 즉위와 기와의 공동 통치

보두앵 5세는 1186년 8월 아크레에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아녜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 보두앵 5세의 섭정이었던 레몽 3세는 나블루스에서 고등 법원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는 시빌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 1세와 그녀의 남편 험프리 4세, 그리고 이사벨라의 의붓가족인 이블랭 가문 사람들이 참석했다. 레몽의 의붓아들들인 위그, 윌리엄, 랄프, 오도 등도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사람들은 레몽이 왕위를 노린다고 생각했다.

한편, 시빌의 삼촌인 조슬랭 드 쿠르트네는 시빌을 지지하며 그녀의 이름으로 아크레와 베이루트를 점령했다. 시빌은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돌아왔다. 그녀와 남편 기 드 뤼지냥은 강력한 무장 호위를 대동하고 도시에 주둔했다.

트리폴리 백작 레몽은 시빌에 대한 지지 세력을 과소평가했다. 울트르조르댕 영주이자 시빌의 첫 남편 굴리엘모의 아버지인 몬페라토 후작은 시빌의 편에 섰다. 또한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와 템플 기사단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도 시빌을 지지했으며, 왕국 원수, 기의 형제 아이메리, 왕국 재상, 리다의 피터, 그리고 집사이자 그녀의 삼촌인 조슬랭도 그녀를 지지했다. 예루살렘에 모인 귀족과 성직자들은 왕위 계승 문제를 즉시 해결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시빌이 가장 유력한 계승자라는 데 동의했지만, 기 드 뤼지냥이 그녀와 함께 공동 왕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결국 귀족들은 시빌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기와의 이혼을 요구했다. 시빌은 이혼에 동의하는 대신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기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의 적법성 인정, 둘째, 기가 야파와 아스칼론 영지를 계속 보유하는 것, 셋째,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남편을 직접 선택할 자유였다. 귀족들은 이 조건들을 받아들였다.

헤라클리우스가 시빌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나블루스에서 온 수도사들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와 제라르 기사단장의 조언에 따라, 시빌은 나블루스에 모인 귀족들에게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아마도 레몽과 그의 지지자들을 달래기 위해 초청장에는 기 드 뤼지냥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시빌은 왕국이 상속권에 의해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블루스의 귀족들은 보두앵 4세 임종 시 했던 맹세를 어길 수 없다며 참석을 거부했고, 심지어 대관식을 금지하기 위해 수도사들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성 요한 기사단의 단장인 로제 데 물랭 역시 시빌 개인에 대한 반대보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참석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왕관이 보관된 상자의 열쇠를 넘겨주도록 설득되었다. 반대파의 방해를 막기 위해 대관식 전에 도시의 문이 닫혔고, 르노 드 샤티용의 권유로 예루살렘 시민들이 시빌을 여왕으로 추대했다.

대관식은 전통에 따라 성묘 교회에서 열렸으며, 시기는 9월 중순경으로 추정된다. 총대주교가 시빌에게 왕관을 씌워준 후, 두 번째 왕관을 주며 새로운 배우자를 선택하라고 요청했다. 이때 시빌은 기 드 뤼지냥을 불러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움으로써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가 이미 기와의 이혼에 동의하고 새 남편을 선택하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그녀의 선택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몽 3세는 이사벨라와 험프리를 경쟁 군주로 내세우려 했지만, 험프리는 밤중에 몰래 나블루스를 빠져나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험프리는 시빌 여왕과의 알현을 요청했고, 잠시 망설였던 여왕은 이를 허락했다. 험프리는 시빌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시빌은 그를 기에게 데려가 경의를 표하게 했다. 로제 데 물랭과 헤라클리우스가 중재에 나서면서, 트리폴리의 레몽과 이벨린의 발두인을 제외한 모든 남작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시빌과 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시빌은 여왕으로 즉위하고 기와 함께 예루살렘 왕국을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8. 살라딘과의 전쟁과 예루살렘 함락

시빌(예루살렘)의 남편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에 오른 후, 트리폴리 백작레몽 3세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영지인 갈릴리로 물러나 살라딘과 동맹을 맺고 티베리아스에 이슬람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계속해서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살라딘은 이를 기회로 삼아 1187년 4월 26일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했다. 5월 1일 나사렛 근처에서 벌어진 크레송 전투에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의 연합군이 살라딘의 군대에게 전멸당하는 참패를 겪자, 레몽 3세는 자신의 가신들의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기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왕국은 이미 크레송 전투의 패배로 인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결국 1187년 7월 4일, 기가 직접 이끈 십자군 군대는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국왕 기는 포로로 잡혔고, 르노 드 샤티용은 처형되었으며,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는 트리폴리로 탈출했으나 그해 9월 병으로 사망했다.

남편 기가 하틴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을 때, 시빌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의 승리 이후 파죽지세로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고, 9월에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시빌은 예루살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와 이블린의 발리안의 도움을 받아 도시 방어를 지휘했지만, 계속되는 공격 끝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살라딘은 몸값을 지불한 주민들은 도시를 떠나도록 허락했다. 시빌은 안티오크로 가는 길에 나블루스에서 포로로 잡힌 남편 기를 만나는 것이 허용되었고, 이후 트리폴리로 가서 계모인 마리아 콤네나와 합류했다. 하틴 전투 이후 몇 달 만에 티레를 제외한 왕국의 모든 영토가 살라딘의 수중에 넘어갔다.

시빌은 남편 기의 석방을 위해 살라딘에게 여러 차례 간청했고, 살라딘은 1188년 7월 기를 석방했다. 부부는 토르토사 근처의 아르와드 섬에서 재회한 후, 군대를 모아 트리폴리로 이동했다. 1189년 4월, 시빌과 기는 티레로 향했으나, 당시 티레를 방어하고 있던 몽페라토의 콘라드는 기가 하틴 전투에서 왕국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이들의 입성을 거부했다. 결국 시빌과 기는 성벽 밖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왕국의 남은 세력을 규합하여 아크레를 탈환하기 위한 공방전을 시작했다.

9. 아크레 공방전과 죽음



1188년 7월, 시빌은 살라딘에게 거듭 간청하여 남편 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부부는 토르토사 근처의 아르와드 섬에서 재회하였고, 이후 북쪽으로 안티오크를 거쳐 남쪽으로 트리폴리로 돌아오면서 군대를 모았다.

1189년 4월, 시빌과 기는 군대를 이끌고 티레로 향했다. 그러나 당시 티레를 방어하고 있던 콘라드는 이들의 입성을 거부했다. 콘라드는 기가 하틴 전투에서 왕국을 포기했으며, 티레는 신성 로마 황제잉글랜드, 프랑스의 국왕들이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자를 결정할 때까지 자신이 관리하겠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시빌과 기는 성벽 밖에서 수개월을 보내야만 했다.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자, 시빌은 기와 함께 왕국의 남은 세력을 규합하여 아크레 공략에 나섰다. 아크레 공방전에는 시빌 부부뿐만 아니라 험프리, 이사벨라, 시빌의 계모 마리아, 발리앙 등도 참여했다.

1190년 여름, 십자군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시빌은 1190년 7월 25일에 사망했으며, 이는 그녀의 두 딸 앨리스와 마리아가 사망한 지 불과 며칠 후였다. 다른 두 딸의 사망 시기는 불분명하다. 시빌과 그녀의 딸들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기는 왕위를 주장할 법적 근거를 상실했고, 왕위 계승권은 시빌의 이복 여동생인 이사벨 1세에게 넘어갔다. 그럼에도 기는 1192년까지 예루살렘 국왕으로서의 권리를 계속 주장했다.

10. 평가

역사가 버나드 해밀턴은 시빌라를 변덕스럽고, 어리석으며, 감상적인 인물로 묘사한 에르눌의 특징 묘사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 묘사가 "알려진 사실과 거의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시빌라의 동시대인과 거의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상적인 여왕에 대한 중세 시대의 지배적인 인식에 영향을 받아 그녀의 군사적 활동보다 기 드 뤼지냥과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가졌다. 남편을 지지한 그녀는 동시대인들의 지지를 얻었고, 로제 드 방도르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덕과 용기로 칭찬받을 만한 매우 칭찬할 만한 여인. 그녀는 왕국이 통치자를 얻는 동시에 남편을 유지하도록 문제를 처리했다.


현대 역사학에서 시빌라의 주요 특징은 기민함과 충성심으로 남아 있으며, 역사학자 헬렌 J. 니콜슨은 이를 동시대의 성별 이상에 의한 그녀의 이미지 왜곡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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